어머님 과 아버님 추억

온양방씨 시조님 묘소 참배

연당 2021. 9. 22. 20:40

시조 始祖 방지 方智 선생의 묘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1014-8

1996년 12월에 아버님을 비롯하여 울산 화수회 회원님들께서 기증하신 거다

도로 입구에서 스타렉스 세워둔 곶으로 약 100M만 가면 제실 입구다

아버님께서는 도유사의 직책으로 오랫동안 관리를 해 오셨으며 문중 제산인 이곳의 임야와

밭 그리고 제실까지 측량을 진두지휘하셨으며 직접 기록으로도 남겨서 나에게 주셨다

이 안내석을 새울 때부터도 잔 심부름은 도맡아 했다

아버님 계실 때에는 행사 때마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했었지만 생활 전선에 있기에 지금은 참여를 못하고 있다

함께 참여하여주신 영광의 울산 화수회 회원님들이었다

산소 입구 안내 표지석이다

이곳에서 솔밭 길 쪽으로 오르면 시조님 묘지다

함께 동참해 주신 영광의 울산 화수회 회원님들

1993년 4월 15일 준공

이 이정표를 먼저 세우고 몇 년 후 자금을 확보하여 바깥 도로변 이정표를 세우셨다

이 자리는 풍수학 적으로 명당이라는 곳이다

예전에 모대학에서 년년이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실습을 나온 것을 직접 본일도 있다

떠오르는 태양 좌 우 로 5봉의 산 봉오리가 있다

이 안내판도 아버님에 작품이다

유수와 같은 세월속에 빛바랜 안내판 을 보니 아버님 이 그리워진다

시조님 묘지로 부터 5 봉우리의 후손들이 함께 계신다

중간 능으로 인하여 다 보이지 않는다

참배를 맞치고 시조님 봉분 위에서 촬영 했지만 역시 다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올해는 잔듸도 잘 자랗고 벌초도 잘되 있어 후손으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름 모를 야생화

아침 안개속 아름다운 야생화가 아름답게 나를 반긴다

마지막 묘지

시조님께 참배하고 마지막 묘지에서 얘를 갖추고 되돌아 욌다

아버님에 정성이 담긴 이곳이기에 언제나 마음가지만 생각만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할 뿐입니다

어제 오후에 방어진에 사시는 6촌 형님께서 전화가 와 받았더니 봉계리 시조님 묘에 도로가 생겨서 길이없어

몾 뵙고 왔다며 서울 화수회 전번을 알려 달나기에 알려주고 밤세 생각하다

오렛만에 시조님 묘소를 찾아 뵜다

결론은 이곳이 아니고 화령군 묘소 부근에 도로를 넒히며 도랑 정비도 하고 축대를 놉게 쌓아올려

예전길이 없어지는 바람에 찾지 못한것을 본인이 잘못 이해 했던것이다

덕분에 조용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경건하게 예를 올릴수 있어서 상쾌한 기분이다

부디 후손들이 번창할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

     故 (행운가득방자경님) 글

1346년이나 되는 온양방가 자손이라면

절대로 종북세력도 반대한민국 세력이
되어선 안됩니다. 
 
설총께서 이두문자를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 올때 같이 오셨던
'월봉 방지'한림학자가 시조로
경주에 시조의 릉이 있습니다. 
 
중국 하림성 황족으로 중국에서
4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고
방씨성은 중국 5대 성씨에 들어갑니다. 
 
우리나라에선 1346년이 되었고
고려시대 정승을 여러 분 내시고
왕비까지 있었던 귀족들이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들 입니다. 
 
고려를 배신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때
고려의 충신들인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여
조선시대때 수난을 겪었습니다. 
 
원래는 경상도 상주가 본관으로
상주방씨였다가 조선시대때
온양 배방산을 임금에게 하사를 받으며
본관이 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아내분이
저희 가문이며 이순신장군의 장인이신
온양 온수군 방진어른이
아산 현충사를 이순신장군의 묘터로 쓰게 주면서
이순신장군 가문과 매년 시제를 같이 지냅니다.
이순신장군의 묘터로 현충사 땅을 주신
이순신장군의 장인이신 온양방가 방진어른의
뜻을 받들어서 양가 후손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건 양가 모두 조상님들의
뜻을 받들어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충심이라고 봅니다. 
 
백선엽장군과 김동길교수님께서
온양방가 시조님 시제에 오시는 이유도
두 분의 어머님께서 온양방가이시기 때문입니다. 
 
윤봉길의사,서재필 박사,
백선엽 장군, 김동길 애국교수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어머님이
온양방가 입니다. 
 
3.1운동 33인 중 한 분인 손병희선생님,
서정주 시인의 아내 분도 온양방가 가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을 도운
방덕룡장군님을 비롯해서
이순신장군을 도우셨던 장군 중에
일곱 분의 장군이 온양방가 분들입니다.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선생님도
온양방가 입니다. 
 
저희 친조부님께서 6.25전쟁 전에
김일성을 죽이러 북한까지 갔다 온
서북청년단 경기도 쪽 부대장이셨듯
제가 지금 박희도장군님 등과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에서
애국활동을 하는 걸 보면
조상 대대로 이어 받은 피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온양방가 후손이면서
조상님들께서 살아 오신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는 거리가 먼
반대한민국 세력으로 살고 있다면
그건 조상님들의 발자취에 먹칠하고
침을 뱉는 배신행위라고 봅니다.

고인에 명복을 빕니다.

####################

성웅 이순신 장군 장인어른

방진관을 찾았다.

이순신장군의 처가댁이다.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지낸 연고로 훗날 장군의 처가 되는 방씨부인이 어릴 적에 이지역에서 살았다.

 

현판 방진관 글씨는 이순신 장군 초서에서 집자하여 만들었다.이곳은 예전 보성군수 관사터였단다.

 

주련에 써있는 내용이 방씨 부인 12살때 유명한 일화다."방공진 사적시진 부인응성 왈유유"

방진공이 적을 쏘다 화살이 다하자,  딸이 대답하여 소리쳤다 "여기 있어요"

 

12살 어린 소녀가 아버지가 화살 가져오라고 소리치자, 당황하지 않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베틀의 대나무다발을 마루바닥에 동댕이 치며 "여기 있어요"하고 응대한다..그러나 도적들은 화살이 많이 남은 것으로 생각하여 도주하였단다.

12살 때 일화는 교과서에서도 배운다.그러나 방진관에서 그녀의 80살 때 일화를 처음 배운다.

장군이 전사하고 종전이 되자 선조는 장군을 선무1등공신 좌의정으로 추증하고그녀는 정경부인 작위를 받았다.

80무렵 장군의 부하였던 이운룡은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충무공 사당에 참배하러 왔다가 부인에게 야단을 맞는다.

"전 상관의 사당에 들어오면서 호각을 불면서 폼잡고 들어오는 것은 미안하지 않은가?'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이운용이 즉시 사죄를 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순신은 한양에서 문과시험을 공부하다가 방씨부인과 결혼 한후 아산 처가에 살면서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고 무과를 준비하여 1번 낙방을 거쳐 32살에 합격한다.

장인 방진은 무관으로 당대 명궁으로 소문이 났단다.

안내판에는 이순신 장군도 명궁이라고 써있는데, 난중일기에 50발에 43발 명중한 날이 있어 86% 명중율이 되는데, 10중 8,9의 실력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 일 중에 가장 큰 공적은 무얼까?

1. 이순신 장군을 죽이지 않은 것

2. 잡히지 않고 신속히 의주까지 도망친거

나는 1번에 한표를 던진다..

왜냐고?

몇십년뒤 명나라 말기 청나라에 대항하여 산해관을 잘 방어하던 명장 원숭환을 모함으로 투옥하여 명황제가 죽임으로써 명나라는 패망으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하던 무렵 이순신은 백의종군하여 합천에 이르렀다.

1597. 7. 18. 이순신은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8. 3. 진주 수곡면에서 삼군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8. 9. 보성군 벌교에 들어왔다.

다행히 보성 고내마을의 조양창에서 봉인을 한 채 온전히 남아 있는 군량미 600섬을 발견했다.장정 6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지역의 이름이 득량면이 되엇다.

8.15.  장군은 선조로 부터 수군폐지령을 듣는다.

그는 울분으로 술에 취해 열선루에 앉아 유명한 장계를 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지금 수군을 전폐시키는 일이야말로 적에게 다행한 일입니다.

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저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현 군청 부근에 잇었다는 열선루는 이제 인근 신흥동산에서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8월 17일 그는 군사1120명과 군량을 끌고 봇재를 넘어 율포해수욕장 인근 명교백사장에서 자고 다음날 군영구미 수군기지에서 병사들을 사열하였다.

그때 보성 의병 3500여명이 수군으로 자원하였단다.

 의병이 제공한 배 10척을 타고 장흥 회령포로 이동하여 배설과 이억추가 끌고온 판옥선 13척을 인수하였다.

그는 처가 동네에서 식량과 군사, 배를 모두 얻어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다.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보성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이제야 알았다.

 

마침 방진관 옆에 활터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궁은 전투체육이자 사교모임이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마다 활터가 있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특히 남쪽 해변지역은 더하다.보성 청학정 활터는 시설이 훌륭하다.

 

방진은 선조초에 보성군수를 역임했으며, 22세에 무과공부를 시작한 이순신에게 무관의 길을 열어주는 등 이순신에게는 장인이며,인생의 스승 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방진은 역대 명궁에 오를만틈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고 이순신과 함께 명궁사에 이름을 남긴 분이며 영특했던 그의 외동딸 방태평이이순신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입구로 딱 들어가면 먼저 보이는 곳이 방씨부인실입니다

이순신장군의 아내 분이신대요 영웅일화만 아는 분들에겐 이순신장군의 아내 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고 알수 있는 곳입니다.

 

 

 

방씨부인에 대한 일가족에대한 방씨부인이 직접 쓴 내용입니다.   

 

이순신장군의 연표와 함께 이순신장군의 갑옷까지 준비가 되어있어요

 
 

방진실 에는 방진과 이순신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와 명궁으로 알려진 방진의 소개 및 온양방씨의 족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이순신장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들이 더욱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실에는 정유년 보성에서 10일간 기록한 난중일기의 내용이 10폭의 병풍처럼 펼쳐저 있습니다.

이순신은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의 중매로 방진의 딸18세 이순신 20세에 혼인을하고 신혼생활을 보성에서 보냈으며, 방씨부인의 현명하고 지혜로움에 장수의 집안에 장수의 아내가 있는것이라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방씨부인은 좋은집안의 딸로 태어난 무관의 아내였으나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기고된다. 남편이 임진왜란으로 전장에 있을동안 모든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 맡아해야 했으며 시부모봉양과 장례, 셋째아들 면의 순국, 결국 남편의 장례마저 치루며 통곡마저 삼켜야 했던 영웅의 아내였습니다. 이순신 전사 후 정경부인 교지를 받아 80세까지 사셨으며 이순신과 함께 합장되어 묻히셨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무기와 보성과 함께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실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sato721/221782439284

'어머님 과 아버님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세대 5남매  (0) 2022.10.18
시조 월봉선생님 시제  (0) 2022.06.21
2020년9월27일 일요일  (0) 2020.09.27
외삼촌  (0) 2019.10.27
가을하늘  (0) 2019.09.13